거미여인의 키스







탐나는도다 터닝포인트 맞이 리뷰. 그들이 사는 세상


터닝포인트 맞이 리뷰 ver.01


탐나는도다 리뷰 첫번째.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은.>




금빛 노을이 반짝이는 제주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박규는 광해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은.” 그렇다. 탐라는 아름다운 곳이다. 원초적인 순수함이 그대로 남아있는 미지의 처녀림과 같은 섬이다. 아름다운 것은 순결하고 고귀하여, 그 존재함으로 모든 이를 매혹시킨다. 그리하여 이 탐나는 섬, 탐라도를 둘러싸고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세력들이 각축전을 벌인다.

첫째. 탐라도의 토착세력인 제사장과 그의 무리들.

“집안일은 어멍이 먼저 아는게 당연하듯 마을일은 제사장 어르신이 먼저 아는게 도리 아니겠수꽈?” 라는 버설이의 대사로 알 수 있듯이 제사장은 탐라의 정신적인 수장이다. 한양에서 내려온 외지인으로 구성된 관아와는 달리 제사장과 그의 수하들은 모두 탐라의 토착민들이다. 또한 관아는 탐라인들에게 포졸과 곤장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폭력적인 지배자이지만 제사장은 어멍처럼 마을일을 보살피며 그들을 자애롭게 이끌어주는 목자같은 지배자이다. 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는 조선에서 제사장이라는 샤머니즘적인 성격이 강한 신분이 등장한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란을 겪은 이후 중앙의 통제는 약화되고 수탈이 가혹해지자, 제사장은 조선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국 탐라를 꿈꾼다. 그는 뼛속까지 탐라인이며, 분명 탐라를 사랑하고 있다. 또한 나라 전체를 바꾸겠다기보다는 탐라만의 자치를 꿈꿨다는 점에서 그의 소망은 단순할 정도로 소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사장은 실패했다. 박규로 대표되는 중앙이 그의 소망을 가로막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신념이 이미 현실과 타협하여 비틀어졌기 때문이다.

“이 탐라에 새로운 세상이 오면 그땐 너도 고마워 할 것이다.”

제사장은 대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불가피하다고 여겼겠지만 거기서부터 그의 신념은 비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설득하거나 이해시키기보다 일단 자신이 거사를 일으키면 백성들은 당연히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이라 생각했다. 지배자의 오만이다. 백성들의 말을 들을 시간이 없는 자는 다스릴 자격이 없다.(이거 술라와 관련된 에피소드에 나온 이야기인데 선덕에서 써 먹었더라?) 소통이 사라진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발전이 있을 수 없고, 제사장은 거기서부터 자멸로 걸어들어가는 스위치를 눌렀다고 생각한다.

두번째. 서린상단

아직 수면 위로 나오지 않았지만 안타고니스트(주인공과 대적하는 인물)로서 확실하게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는 집단이다. 과거회상 씬으로 볼 때 서린은 아마 인조반정 때 멸문당한 북인가문의 여식으로 인조와 서인들에게 복수를 꿈꾸고 있는 듯 하다. 현 시점이 인조 16년이라고 했으니까 꼬박 16년동안 이를 갈고, 피를 돌리며 복수를 다짐했을 서린은 조선 최고의 상단을 거느리고서 청과 왜, 그리고 동인도 회사와의 교역을 시도할만큼 수완좋은 여장부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서린은 사극 여주인공이 가져야 할 삼단콤보세트- 미모, 반역으로 멸문당한 귀한 가문의 아가씨로 이글이글거리는 복수심, 막강한 자금력과 조정신료들을 좌지우지하는 배짱과 수완-을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안 그래도 매력적인 서린이라는 캐릭터를 더 멋있게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과도한 연출이 눈에 튄다(띄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상도 이후로 상단을 이끄는 단주들은 외국과 교역을 할 때 꼭 자해크리를 보이더라? 도자기 깨는 장면은 클리셰의 반복으로 보여 지루했다. 연출에 지나치게 힘을 주면서 ‘이 여자 대단하지? 멋지지?’ 라고 시청자들을 압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쨌든 서린상단의 최종목적은 다시 한번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옹립하고 인조와 서인들을 쫓아내는 것이며,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와 손을 잡고자 하며, 그 때문에 탐라도를 조차지로 넘기고자 하는 것이다. 서린상단에게 탐라도는 최종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단에 불과하고, 제사장도 한번 쓰고 버릴 패였다.

다만 규(규느님, 좐느님, 이방의 남자. <<셋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가 서린상단의 패를 득템했으므로 제사장의 죽음으로 자신들의 존재가 어둠 속에 감추어졌다고 믿는 서린의 판단은 틀렸다. 2부부터는 청에서 귀국한 소현세자와 강빈이 등장할 것이며 아들을 죽이려는 인조와 그를 따르는 조정대신들로 인해 한성이 시끄러워질 것인데, 이런 정치적 흐름 속에서 서린은 어떤 행보를 보이게 될지, 규와 윌리엄이 어떤 교차점을 만들게 될 것인지 기대된다.(정말 기대되는데 그놈으 조기종영.-_- DVD 발매 이전에 보여주는 주장미라 생각하고 봐야지. 뭐.)

세번째. 조선

조선은 기존의 탐라를 다스리고 있는 지배세력, 즉 양반이다. 유교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탐라의 순수를 미개함이라 취급하는 그들은 중앙(한양)에서 온 타지인이고, 남성이다.(규, 이방나리, 기타 탐라의 관리들.) 드라마 속에서는 조선의 지배자체를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듯 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일부 무능하기도 하고, 고압적이며 백성들과 소통을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시청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고지식하고 인정머리 없었던 이방나리(또는 규바라기♡)는 상부의 명령에만 충실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민심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탐라에 도착해서부터 한동안 ‘무엄하다!’ 만 외쳤던 박규는 백성들이 당연히 바쳐야 할 것으로 여겼던 진상품들이 ‘이곳 여인들이 땀과 눈물로 걷어들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만 탐라에 와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규가 과연 중앙에서 어떤 행보를 보이게 될까?
규는 명문가의 17대 독자이며 과거는 모조리 장원급제. 거기에 무술실력까지. 한마디로 조선시대 엄친아이다. 즉, 그는 양반-아마도 서인-이자 남성이라는 지배계층의 수혜를 모두 받고 자라났고, 앞으로도 부귀영화가 보장된 탄탄대로를 걸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인조를 위시하여 보수지배세력인 서인들은 시작부터 정당성의 부재에다가(인조반정) 호란을 통해 자신들의 무능함을(삼궤구고두, 세자는 볼모로 끌려감.) 만천하에 알렸으므로 일전에 자신들이 그러했듯 누군가가 저들의 자리를 빼앗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허약해진 자신들의 기반을 보강하기 위해 더욱 폐쇄적으로 변한 그들은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자라나는 변혁의 씨앗을 모두 짓밟는다. 2부에서 등장할 소현세자와 강빈이 그 대표적인 희생자들로, 그들은 청에서 가져온 변화의 흐름을 펼치기도 전에 인조에게 살해될 것이다. 이 때 규는 과연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것인가?

1부까지 규가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면, 2부부터는 규의 가치관은 기존 질서와 갈라지게 될 것인데 결말과 관련하여 과연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기대된다.(그런데 조기종영. 정말, 이걸 어떻게 6화 내에서 풀어내냐규!)

그러나 탐라는 탐라를 탐내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오직 탐라 백성들의 것이다. 사실 탐라 백성들은 위 세력 중 그 누가 탐라를 다스려도 상관이 없다. 그들은 진상품을 바치라고 하면 바칠 수 밖에 없는 ‘힘없는 백성’이기 때문이다. 몇 천년 동안 아랫 것들이 아랫 것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왜?’라는 의문을 가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한 물질(하마터면 갤질이라 쓸 뻔했다.;;) 내일도 하고, 모레도 하며 그리 살아야 하는 것이 탐라에서 태어난 좀녀의 운명이라 여기며,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그러나 그러하기에 탐라는 자신을 지배하려는 자들의 것이 아니며 단지 어우러져 살아가는 탐라인들의 것이다.




탐나는도다 리뷰 두번째.

딱 한마디만 하고 시작하자.

“연출, 대본, 연기, ost까지 완벽한 이 드라마에 오직 하나 부족한 것은 편성 뿐이외다.”


<탐나는도다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 소통.>

윌리엄은 17세기 영국사회에서 신흥귀족으로 부상한 상인계급 출신의 남성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17세기는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사회 전반에 ‘모두들 동양으로 진출하여 새로운 무역활로를 개척해봅세’ 라는 분위기가 퍼져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제국주의로 변화하게 되지만, 어쨌든 이 시기의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신비롭고 돈이 되는 미지의 땅이며 정복의 대상이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의 산물이므로 윌리엄의 사고관에 이런 오리엔탈리즘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윌리엄은 동양의 도자기를 가지고 싶어하며 동양의 문화를 동경하여 직접 나가사키로 떠나기까지 한다. 이 ‘동경’이라는 시각에는 이것은 나와 다르다는 사고가 깔려있고, 이 다르다는 구별은 소통의 부재를 의미한다.

박규는 조선 한양 양반가문 출신의 남성으로 앞의 리뷰에서 언급했다시피 기득권 계층의 모든 수혜를 받고 자라났다. 이런 출신배경으로 그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의 사상 전반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유교질서이며, 신분과 계급과 성별로 사람을 분리하여 인식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즉, 그는 사람을 보기 이전에 그 사람을 옭아매고 있는 신분과 성별을 먼저 보아왔었다. 이는 규 역시 다른 세계와의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했음을 의미한다.

그럼 이런 두 남자는 어떻게 소통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걸까?

“여기는 탐라도라. 한양 생각일랑 몽땅 지워부려라!”

윌리엄은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표류하여 제주에 도착했다. 영국 귀족이라는 신분은 어디에도 없이 단지 맨몸 하나 가지고 탐라에 떨어진 셈이며 이는 박규가 양반이라는 신분을 잃고 귀양다리가 되어 단지 박규라는 한 인간으로 제주로 온 것과 같다. 그들은 여전히 윌리엄이고 박규였지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가 완전히 변화했고, 나를 구성하는 한 요소인 ‘타인이 보는 나’가 변했다. 그들의 가치관은 변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그들 스스로가 변화하게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떨어진 곳이 탐라도라는 특수한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17세기 세계의 역학관계 속에서 조선이 변방이었다면, 탐라는 그런 변방 중에서도 가장 중앙에서 소외된 공간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탐라는 신분과 계급이라는 기존질서가 통용되지 않는 순수한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탐라 내부에서 여성이 가지고 있는 지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윌리엄과 박규가 맨몸으로 던져졌다고 해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 변화하지 않는 게 있다면 바로 남성이라는 성(姓)이다. 영국이든 조선이든 기존 질서에서 남성은 지배계층이었다. 하지만 탐라는 잠녀가 물질하여 서방 건사해야 하는, 성별의 위치가 역전된 장소이다. 이런 배경이 그들을 한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마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탐나는도다가 여러가지 장르가 혼합되어 있지만 세 사람의 관계도를 보았을 때는 분명 로맨틱코미디라는 요소도 들어가 있다. 로코물에서 남자 주인공은 재벌, 사극에서는 왕족, 양반이며 여자 주인공은 가난한 서민, 사극에서는 천민이나 평민이라는 게 공식이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과 시청자들이 우러러 봐야하는 동경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로코물의 전반에 깔려 있는 사고관은 재벌이라는 상위 계층에 대한 환상이며 동경이다. 시청자들은 여자 주인공에게 몰입하여 자신도 저런 상류층의 경험을 해보기를 원하며 그런 시청자들을 위해서 여자 주인공은 신데렐라가 되어 왕자님의 성에 입성한다. 그들의 사랑은 자본주의에 종속된 연애감정이다. 물론 남주가 잠깐동안 서민생활을 경험해보기도 하지만 그건 단발성 이벤트에 불과하다. 남주는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며 결국 여주가 유리구두를 신고 발돋움을 하여 그들의 세계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탐나는도다에서 남자주인공들은 무려 방송분량의 절반인 10회동안 탐라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남자주인공들은 여자 주인공과 그녀의 세계에 기꺼이 적응하고 변화하며, 동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건 로코물의 두번째 공식인 여주에 의한 남주의 인격적 결함 복구와는 다르다. 윌리엄과 규는 시식코너에서 맛보기하는 것처럼 여주의 서민생활 패키지를 경험하고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았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그들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를 겪는다.

버진은 규에게 ‘힘없는 백성’으로 다가왔으므로 규의 감정변화는 그가 지니고 있던 지배관의 변화와 함께 시작된다. 규의 감정선이 가장 설득력 있었던 것도 드라마 흐름 자체가 규가 진상품 도적을 쫓는 것과 궤를 같이하며, 규가 백성들을 엄히 다스려야 할 천한 것들이 아니라 안쓰럽지만 강하며 아름다운 이들로 여기게 되는 것 과정이 차근차근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윌리엄은 그런 변화의 과정이 나오지가 않았고, 이는 윌-버 라인의 감정선이 얄팍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윌리엄은 탐라인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모습이 나오기는 했지만 커피대접 에피소드는 정말 단순 이벤트성 에피에 불과했다. 귀양다리를 보내면서 탐라인들은 눈물이 글썽거렸지만 윌리엄이 한양으로 가는 건 ‘저 이양인 한양가네’ 정도 밖에 안 되었다. 이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윌리엄과 귀양다리가 배를 타고 떠나는 씬에서 버진과 윌리엄이 애절하게 이별하는 모습보다 규가 ‘잊어라. 모두다. 잊는 것이다’ 이 한마디가 더 가슴 아프게 심장에 꽂혔던 것이다.

또한 순수와 수동성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윌리엄과 버진의 감정이 동화처럼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시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동양문화에 심취하여 무작정 배를 타고 나가사키로 떠날 만큼 능동적이었던 윌리엄을 한 마리의 순한 양으로 그려낸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윌리엄의 순수성만 부각시킨 것이 아니라, 그 순수 아래에 있는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을 상기시켜 그런 가치관이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규처럼 그의 감정선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살아온 세계가 다르고, 살아갈 세계가 다르다. 하지만 나와 다른 너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에게 부여한 축복이다. 사랑만으로는 사람이 변화할 수 없지만 사람이 변화했기에 나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던 너를 사랑할 수 있다. 또한 소통은 아래에서 위를 동경하여 무언가를 밟고 올라가 나누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 무릎을 굽혀 동등한 눈높이를 맞출 때 가능한 것이다. 무릎을 굽히는 수고를 감수하면서 낮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해보려는 사람이 있을 때, 그리고 그런 소통을 그려내는 드라마가 나올 때 우리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희망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 아랫글, 탐나는도다 캐릭터 리뷰(이 탐나는 캐릭터들)로 이어집니다.


탐나는도다 캐릭터 리뷰 그들이 사는 세상


터닝 포인트 맞이 리뷰 세번째.  

이 탐나는 캐릭터들.
 



장버진(virgin)


(동의어; 맣아지, 븅어, 삼방골 최고 미녀, 신분이 급상승하여 이제는 아씨라고도 불린다.)


버진. 그녀의 이름에서 여러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미답지, 원초적인 생명력으로 숨쉬는 처녀림. 아무도 쓰지 않는 1원짜리 동전이 순결하게 반짝이는 것처럼 버진은 가장 천하고 소외된 신분이기에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다. 마치 그녀가 탐라 자체인 것처럼. 그러나 버진의 순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지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버진은 잠녀가 물질하여 서방 건사해야 하는 탐라에서 나고 자랐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현실에서 버진은 윌리엄을 다른 사람들 손에서 지켜주며, 골패판을 들락거리며 인생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귀양다리를 진지하게 걱정해준다.


머리가 썩 좋지도 않고, 뛰어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행동할 줄 아는 버진의 적극성, 푸른 눈의 이양인을 아무런 편견 없이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그녀의 개방성, 평생 잠녀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할 수 있는 그녀의 용기, 사랑이라는 감정에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는 그 행동력. 이런 강함이 버진의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든다.


버진은 천출 잠녀이다. 탐나는도다가 기존 퓨전 사극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그녀가 원래부터 천출이라는 점에 있다. 지금껏 사극의 여주인공들은 적어도 원래는 양반이었다. 다모의 채옥은 멸문한 양반가문의 여식이었고, 한성별곡의 나영 아씨 역시 반역으로 집안이 멸문하여 관비가 된다. 내가 쾌도 홍길동은 제대로 안 봐서 정확하진 않지만 이녹이도 본래는 양반가문의 아가씨인 걸로 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게 드라마 내용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요소를 넣어야 하는데 여성의 정치참여가 배제된 그 시대에 여주인공이 이런 사건과 연관되기 위해서는 고귀한 혈통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버진은 이양인인 윌리엄과 연관되면서 <얀-동인도회사-서린상단-제사장-소현세자와 규> 라는 연결고리 속에 얽히게 되고, 천한 신분이면서도 정치적인 사건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사극 속 주인공들의 출신이 적어도 양반 이상일 수 밖에 없었던 한계를 깨뜨렸다는 점만으로도 탐나는도다는 칭찬받을 만하다.




 
죽을 때까지 탐라를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면서도 살아갈 유일한 수단인 물질을 못하는 잠녀. 버진은 탐라에서 이방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버진이 윌리엄을 사랑하게 된 건 윌리엄이 그녀를 최초로 긍정해 준 타인이기 때문이다. 가족도 아니고, 탐라인도 아닌 남자가 그녀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애정을 주고,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속삭여준다. 버진에게 윌리엄은 그녀가 동경하는 바깥세계가 한 존재로 화하여 다가온 것이다. 탐라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픈 열망은 그대로 윌리엄에 대한 애정이 되었다. 버진이 무작정 탐라를 떠날 결심을 한 것은 외부세계가 윌리엄처럼 그녀를 긍정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폭풍편집으로 인해 감정선이 뚝뚝 끊겨 어장관리녀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버진은 타인의 감정을 자기만족을 위해 휘두를 만큼 잔인하지도 못하고, 순진하기는 해도 타인의 행동에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는 않다. 무려 4화에서 버진이 박규에게 “혹시 시샘하는 거야?”라고 묻는 장면을 봐라. 여자의 식스센스는 인종과 신분과 시대를 막론하고 날카롭다. 어렴풋이 박규의 감정을 눈치채고 있지만 버진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건 박규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확신할 수 없는 감정에 도박을 하지 않는다.


또한 윌리엄이 자신만을 보고 있으며, 자신 역시 그와 함께 떠날 결심을 할 만큼 그를 좋아하는데 이제 와서 규에게 흔들린다면 버진이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서 버진은 자신이 박규에게 끌리고 있다는 걸 열심히 부정하며, 그 부정은 규에게 늘 윌리엄 소식을 묻는 것으로 나타난다. 규 앞에서 윌리엄을 걱정하는 건 “이 남자야. 질투 나지? 그럼 표현 좀 해봐! 확실히 알 수 있게.”라는 뜻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윌리엄이야. 윌리엄이야. 윌리엄이야.”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거는 것이다.


두번째 사랑은 두려움을 수반한다.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의 존재가 타인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 때문에 마음은 일정 선을 넘지 못하고 뱅뱅 돈다. 윌리엄에 대한 버진의 감정은 첫사랑답게 맹목적이고 솔직했지만 규에게는 그럴 수가 없다. 게다가 11화부터는 제주에서 한양으로의 공간이 변화한다.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로의 귀환으로 박규는 귀양다리에서 나으리가 되었다. 버진의 망설임과 두려움은 더욱 깊어지겠지만, 버진답게 탐나는도다답게 멋지게 풀어내리라고 믿는다.



 로코물에서 여주인공은 반드시 사랑받는다. 보통은 둘, 때로는 셋 이상. 따라서 드라마 내용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여주인공이 반드시 사랑받을만 해야한다. 머릿 속을 표백제로 세척한 마냥 뇌가 청순한 여자에게서 매력을 느낀다면 당신은 참으로 관대한 사람이다. 하지만 대개의 시청자들은 관대하지 않고, 그들이 여주를 보고 ‘저런 여자를 대체 왜 좋아하는 거야?’(남자들이여. 이건 열폭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 드라마는 로코물로서는 실패작이다. 위 공식에 따르자면 탐나는도다는 로코물로도 성공했다. 버진은 정말 사랑스럽다. 버진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매력은 서우라는 배우가 분했기 때문에 200% 이상 발휘되었다. 울어도 예쁘고, 웃으면 더 예쁘다. 오밀조밀한 얼굴에서 쉴새없이 다양한 표정들이 만들어지고, 행동 하나하나가 귀엽고 사랑스럽다.

여배우에게 사랑스럽다는 건 얼굴이 예쁘다는 것보다 훨씬 좋은 장점이다. 이렇게 예쁘고 연기도 잘하는데 사랑스러움까지 갖춘 여배우가 있다는 건 앞으로 눈이 호강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일테니, 서우 양의 차기작도 기대하겠다.

덧) 이걸 읽을 리는 없겠지만 ^^;; 서우 양. 힘내세요! 시청률이 낮다고 하여 작품성이 떨어지는 것을 결코 아니며, 이른바 명품이라 불리는 드라마에서 열연했던 배우들은 시일의 빠르고 느림이 있을 뿐 반드시 뜨게 되어 있습니다. 6%라 해도 충성도 높은 팬이 생겼으니까요.




박규.


(동의어; 규느님, 좐느님, 환느님, 이방의 남자, 규데레. 등등)


엄격한 법도와 완강한 신분질서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정동은 몸부림친다. 그들을 옥죄는 시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의 사랑은 애절하고 아름답다. 무릇 사극을 보는 즐거움은 거기에 있지 않은가. 마음에는 담아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고, 끓는 듯한 애정을 초연이라는 가면 아래 숨겨야 하는 연인들.




박규는 양반 사대부이며 그의 사상 전반을 지탱하는 것은 유교이다. 그런 그가 신분질서와 법도를 어긴다는 것은 하늘이 두쪽 나야 가능한 것이다. 버진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그는 하늘을 두쪽 냈겠지만 이 망아지는 자신을 보면 맡겨두기라도 했는지 윌리엄만 찾는다. 사랑은 불가항력이 아니고, 세월은 힘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박규는 “잊어라. 모두 잊는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버진을 보면 붙잡고 말 자신을 알고 있기에 그는 버진이 들어오기 전에 등불을 끄고, 마지막이라고 울먹이는 버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얼굴조차 내비추지 못한 채 방안에서 오열한다. 스스로에게 흔들릴 일말의 기회도 주지 않는 그의 모습, 그저 나비처럼 맴도는 그리움과 엇갈림으로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만들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가지마라!” 까지 터져주시니 이건 뭐 말다했다.


하지만 박규의 매력이 이것만이 아니다. 기존 사극 남자주인공들과 차별화되는 그의 매력은 단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그의 복잡다단한 성격에 있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상대를 내려다보는 그의 도도함, 진상품 도둑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그의 진지하고 엄격한 표정, 그러다가 때때로 보여주는 허세스러움 작렬하는 유치한 행동들. 그저 융통성 없는 선비인 줄만 알았는데 거짓말을 해야 할 때는 “그게 참, 사람의 천성이라는 게.”라며 능청을 떨 줄도 알고, 정이 든 탐라 백성들과 헤어지는 자리에서는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다정하기도 하다.


남자들이 간혹 착각하곤 하는데 여자들은 정말 잘난 남자들에게는 약하지 않다. 여자는 나 없어도 잘 살 것 같은 남자보다 나 없으면 안될 것 같은 남자에게 흔들린다. 박규를 봐라. “나, 박규다.” 이 대사 하나에 함의된 강한 자부심, 그 자부심의 근거가 되는 그의 뛰어남, 미소 한방에 장안의 여자들을 자지러지게 만드는 그의 미모, 심지어 도박까지 잘하는 그의 잘남 때문에 그가 매력적인 것이 아니다. 탐라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가 얼마나 망가졌던가.



부녀자 희롱죄로 탐라로 귀양왔다고는 하나 시청자들은 그에게 숨겨진 뭔가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전복 두 접에 팔리고(세 접도 아니다.) 우리집 고팡에 얹혀사는 귀양다리에, 식충이라 불리며 굴욕을 당한다. 진지하고 잘난 캐릭터가 망가지는 모습에서 즐거움을 느끼던 시청자들은 가끔 보여주는 그의 암행어사로서의 모습에 열광한다. 동시에 그가 금과옥조처럼 지키던 신분질서를 뛰어넘어 백성들의 고단함을 알고, 마음 아파할 줄 아는 진짜 관리로 변화하는 모습에 반하고, 철벽같은 가면 사이로 엿보이는 그의 여린 모습에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이 모든 매력도 배우가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룹 에이트 송병준 대표가 임주환씨에게 ‘넌 그냥 박규다.’ 라고 말했다는 것을 인터뷰에서 읽었는데 정말 그렇다. 그의 애드립이라는 몇몇 대사들을 들어보면 임주환씨가 박규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으며, 박규라는 캐릭터 그 자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모델 출신이라 그런지 한복을 입고서도 걷거나 앉을 때의 자세가 매우 깔끔하고 반듯하다. 사극을 보면 간혹 옷에 눌리거나, 높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몸가짐이 전혀 우아하지 않은 배우들이 있는데 그거 꽤 거슬린다. (그런 의미에서 주환씨 사극 한편 더 찍죠?)
그리고, 많은 분들이 칭찬하는 거지만, 임주환씨 발성과 발음이 무척 좋다. 이방 나으리와 함께 대화하는 씬을 보면서 내 귀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고 싶은 것이지 한국어 듣기 능력 시험을 치르는 게 아니다. 그러니 굳이 이니셜을 쓰지 않아도 다들 누군지 짐작할 수 있을 몇몇 배우들이여. 제발 발음 연습 좀 하세요. 발성과 발음은 노력하면 고쳐지지 않습니까? 탐나는도다에서 임주환씨를 처음 봤기에 나는 그의 발성과 발음이 원래 좋은 줄 알았는데 예전 작품들과 라디오를 들어봤더니 그동안 임주환씨가 많이 노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연기 욕심이 많은 배우들은 다음 작품을 기대할 수가 있다.


한가지만 (쓸데없이) 당부하자면 임주환씨 담배 끊으셨으면 좋겠다. 그 목소리, 하늘이 주신 겁니다. 아끼세요.




윌리엄



(동의어;일리얌)


도자기를 사랑한다. 무작정 배를 타고 지구 반대편까지 떠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그가 도자기(라 쓰고 요강이라 읽는다)를 깨뜨리면서 자기 보물은 이게 아니라고 말한다. 애시당초 탐라에 표류하게 된 이유였던 도자기는 이제 그에게 의미가 없다. 버진이라는 보물을 발견했으니까.
 

첫사랑은 맹목적이다. 스스로와 상대에게 지나치게 솔직하며, 흘러 넘치는 애정들을 주체할 수가 없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단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세계는 완벽해지고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윌리엄과 버진이 줄곧 함께 하는 장소가 동굴이라는 것, 마치 자궁 속처럼 습하고 어둡고 따스한 곳이라는 건 그들의 애정이 그만큼 순수하고 맹목적이라는 걸 상징한다.

앞의 리뷰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윌리엄의 캐릭터가 빈약해진 이유는 생략하고 넘어간다. 어쨌든 윌리엄이 수동적이고, 오로지 버진만을 외치는 캐릭터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윌-버 라인의 약화를 낳았다. 그럼에도 윌리엄은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영국에서 나가사키로 떠날 수 있는 적극성,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도 좌절하지 않는 낙천성,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솔직함이 있으므로 윌리엄은 버진 뿐만 아니라 다른 조선인들과 소통을 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냐에 따라 막판 뒤집기도 가능하다.


분명 가슴 아픈 장면이였을 먹물씬이 폭풍편집크리에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게 안타깝다.


 

얀.


(동의어; 얀데레)


그는 17세기의 코스모폴리탄이다. 핏줄로는 조선이나 나고 자란 땅은 일본이며 국적은 네덜란드이다. 그러므로 혈육도, 고향도, 나라도 그를 속박할 수 없다. 그의 정체성은 자신이 동인도 회사에 속한 무역상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얀은 ‘돈’을 위해서 움직인다. 윌리엄을 향한 감정도 우정이 아니며, 그를 다시 영국으로 데려가려는 것은 윌리엄의 어머니에게 받을 돈 때문이다. ……라고 얀은 생각한다. (이래서 얀데레.)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자랐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잡혀온 조선인 포로의 후손이 일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짐작한다면 그가 조선을 그리워하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불신을 주었다. 그건 아주 근원적인 불안이다. 혈육이나 나라가 소중한 건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자신을 구성하는 밑바닥에 존재하여 대지에 발붙히고 서게 해주는 지지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저 자는 믿을만 한가?” 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다니며, 꽤나 정 떨어지는 말투로 이야기한다. 먼저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이제 윌리엄과의 우정, 버진, 박규와의 관계 속에서 얽매이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게 싫었다면 돈이고 뭐고 간에 윌리엄을 두고 혼자 떠나면 되었을 것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얀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속박당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는 이제 “믿을만 한가?”라는 의문을 품지 않고서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다.



최잠녀.


(동의어; 버진어멍, 대상군)


그녀의 한숨은 폐부 깊은 곳을 긁어내리는 듯이 무겁다. 그녀는 버진어멍이며 삼방골 잠녀들의 대상군이기에 먹여 살려야 할 입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대상군은 단순히 잠녀들 중 가장 물질 실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관아라는 지배계층을 향해 잠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잠녀들 중 한 사람으로 그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귀양다리를 자신의 집에서 머무르게 하는 대가로 그녀는 자신의 이익이 아닌 삼방골 진상품의 부담을 줄여줄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그녀는 윗것들과 적당히 타협을 볼 줄 아는 노련함을 지녔고, 잠녀들을 어르고 달래며 물질하러 나가는 정치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결정적으로 대상군에게 반한 장면은 바로 끝분어멍에게 갱이주를 권하면서 “대상군 한 번 해봄시이 좋았냐?” 라고 말할 때였다. 정적암살과 권모술수는 최고로 질이 낮은 정치다. (그런 점에서 영의정을 반대파라고 바로 죽여버린 서린은 정치감각이 무척 떨어진다.) 아랫것들에게 환상을 품는 대신 그들의 시기와 반대를 포용할 줄 아는 배포, 그러면서 한사람 한사람 챙길 줄 아는 섬세함이 공존하고 있는 리더가 있다는 건 그 조직에게 축복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실수를 한다. 실력이 가장 좋은 끝분 대신 버진을 남바르에 보낸 것은 분명 잘못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저지른 거다. 그 어쩔 수 없는 모정, 그녀는 대상군이기 이전에 버진어멍이기 때문에.




이방나리


(동의어; 규바라기)



중인계급은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할 수 없다. 능력이 있음에도 태생부터 기회를 박탈당한 자는 어떻게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할까. 세상을 부정하거나, 나를 부정해야 한다. 이방은 세상을 긍정하기로 결정한다. 그 쪽이 훨씬 살기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분질서를 부정하려는 자라면 자신조차 용서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유교질서에 종속된다. 자신이 높으신 분들을 받들 듯 아랫 것들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고,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철두철미하게 법도를 지키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결국 백성들을 위한 길이라 믿었다.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해서 윗사람이 귀찮아한다 해도 의문이 남은 일은 끝까지 파고들어 결국 진상품 도적을 찾아낸 그는 제사장을 따르는 무리에게 “믿고 따르던 탐라의 백성들까지 기만한 죄”를 묻는다. 그의 저울 위에서 탐라의 백성들을 기만한 죄는 나랏님께 바칠 진상품을 훔친 것보다 더 무거웠다. 진심은 통하는 법일까? 이방이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 탐라 백성들은 통곡했다. 그가 만약 인정머리 없기만 한 사람이었다면 결코 나오지 않았을 눈물이다.


이방나리로 열연하신 조승연씨는 연극배우 출신이어서 그런지 발성이 정말 좋았다. 목소리의 강약을 능란하게 조절하고, 감정을 적재적소에 배분하면서도 또박또박하게 들리는 발음에 귀가 호강했다.



제사장
 


“현실은 늘 신념을 어둡게 하지요. 어찌 희생하지 않고 신념을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한성별곡에 나온 이판의 대사이다. 여기서의 희생은 대의를 위한 너희들의 희생이 아니라 스스로를 그 신념의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이판은 이 대사처럼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의 목숨을 바쳤다. 그렇기에 그는 죽었지만 그의 신념은 피를 먹고 자라나 후대에 전달될 수 있었다.

시작의 명분이 타당하고, 그들의 분노에 공감한다 할지라도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혁명은 이미 정당성을 잃었다. 제사장의 실패는 거기에 기인하며 이는 서린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인조와 서인 기득권 세력이 부패했음은 뇌물을 받는 모습에서 이미 드러났다. 소현세자가 나오는 만큼 권력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기득권 세력이 얼마나 추잡하고 비루한지 여실히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제사장과 서린이 실패하는 이유는 기득권 세력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타인을, 즉 탐라도를 희생시키면서 신념을 지켜내려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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